인터넷 쇼핑몰 창업계기 직장생활
2025년 01월 16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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취업과 창업을 해던 용산구 갈월동 하숙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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돌이켜보면 아련한 곳이다. 천안에서 서울로 올라오며 시골에서 1톤 트럭에 책상이며 이불등을
가지고 와서 하숙하며 직장생활하던 곳이다. 이 곳을 선택한 이유는 절친형이 이 곳에서 살면서
근처의 비트컴퓨터 학원을 다니며 프로그래밍을 배우고 있었기 때문이다.
당시 강남 뱅뱅사거리 근처의 직장에 취업하여 서울로 올라왔는데 7,8명이 일하는 작은 회사였지만
한국은 아직 IMF체제하였기에 취업을 했다라는 것만으로도 감지덕지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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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에서의 직장생활.
그 곳에서 웹마케팅업무로 들어갔는데 작은 회사라 사수가 없어 누군가에게 배우지도 못한 채 하나 하나
스스로 배워가야 했지만 배워야 한다는 생각으로 열심히 일했다. 회사의 수익모델이 당시의 피처폰에
여행,숙박 예약 서비스를 제공했다. 피처폰의 운영체제도 다 달랐다. 011,016,017,019 참 많은 통신사들이
있었다. 신세기통신? 한솔M닷컴등 지금은 사라졌지만 그 운영체제에 맞는 코드을 짜기 위해
통신사들이 개발자들을 불러서 교육을 시켰고 나는 각 통신사의 교육을 받고 제공한 책자를 보며
하나 하나 다시 코딩을 하곤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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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사에서 SK통신의 TTL서비스중 “TTL세계로가다”라는 메뉴를 관리하고 있었다.
어학연수나 해외유학 프로그램등 정보를 제공했는데 서비스 기획을 위해 강남에 있는
어학원들은 거의 다 돈 것같다. 어학원 담당자와 상품 기획을 하고 상품자료들을 취합하여
다시 인터넷에 올리는 작업을 했다. 인력이 부족했기에 다로드는 이 때 포토샵이며 그나마
턱도 없지만 웹디자인 근처에 갈 수가 있었던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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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의 불편은 극복을 위한 동기다.
하숙집은 온수가 나오지 않았다. 1월에 취업을 했고 하숙집에서
가장 먼저 일어나 마당의 수돗가에서 찬 물로 머리를 감고 도시락을 싸서 회사의 문을 열고 들어오면
7시 남짓. pc를 부팅하고 그 곳에서 매일 야근은 물론 가끔은 철야도 했다. 야근을 하면 저녁식사가 해결이
되었다. 당시 받은 첫 월급이 생각이 난다. 면접볼 때 연봉은 어느정도 생각하냐는 사장님의 질문에
“전 일을 하고 싶습니다. 월급은 얼마를 주던 상관이 없습니다.” 라고는 했지만 두근거리는 마음으로
현금지급기에 카드를 넣어봤다. 65만원이 찍혀있었다.
내가 모르는 것이 너무 많아서 그렇다. 알아야 한다. 나의 몸 값은 내가 정하는 것이다.
당시에는 토요일 12시까지 근무를 했기에 회사가 끝나면 집으로 와서 식후 잠을 한 숨자고
일어나 집 위쪽에 있는 용산도서관과 남산도서관으로 책을 들고가서 공부를 했다. 두 도서관을
간 이유는 쉬는 날짜가 달랐기에 말이다. 난 공부해야 했다.
당시 벤처기업 투자가 묻지마식 열풍이 일었다. 회사가 사명을 닷컴만 넣으면 주가가 오른다고
할 정도였다. 우리회사에도 투자가 진행중이었다. 내심 기대를 했다. 많은 IT기업들이 직원들에게
지분을 주거나 유무형의 지원을 했기 때문이다. 적은 월급받으며 고생해서 회사가 이 만큼 성장했다는
보답이었다. 하지만 직원들에게 돌아오는 것은 없었다. 직원들간에 동요가 일었다.
결국 적지 않은 직원들이 회사를 나서게 되었다. 나도 결국 이직을 준비했고 다른 회사로 옮기게 되었다.
사장님과 인간적이 정이 있었던 것은 아니었지만 잘 계시기를 바란다.
그래도 나에게 일할 공간과 각오를 다지게 해 준 분이었으니 말이다.
로드뷰로 보니 집이 기억이 난다 . 정확하게도, 어찌 잊을 수가 있을까. 퇴근 무렵이면 저 집을 보면서 이 작은 언덕을 올라왔으니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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할머님은 지금도 계실까? 식사도 잘 나왔고 겨울에 난방도 참 잘 해주셨고
걱정을 많이 해 주셨던 분이었다. 직장을 다니고 또 학원을 다니고 창업을 했던 곳.
퇴근 후면 컴퓨터를 켜고 이 것 저 것 들여다 보며 현실을 자각하던 곳이다.
그리고 미래를 위해 발을 내 디딘 곳이었다.
후에 직장과 오프라인 유통업체에서 온라인 마케팅을 하다가 그 경험으로 쇼핑몰 창업을 하게 된다.
내 사업을 해야 돈이 된다라는 사실을 알았고 지금의 내 월급으로는 서울에 전셋집도 구하기 어렵다는
사실을 깨달았으니 말이다.